역사 중에서도 서양사에 관심이 많고 또 그중에서도 나폴레옹에 제일 관심이 많다.
그래서 평소에 나폴레옹에 관련된 역사서 및 인터넷 자료를 즐겨 보는 편이다
그런데 어느날 나폴레옹이 아닌 나폴레옹의 자식들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열심히 찾아보았고 여기서 이제 나폴레옹의 아들들에 관해서 말을 해보려고 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원래 이렇게 카리스마있게 안생겼다. 존나 파오후임)
대다수의 역사 좀 아는 게이들은 나폴레옹에게 나폴레옹 2세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
나폴레옹 프랑수아 샤를 조제프 보나파르트(Napoleon Francois Charles Joseph Bonaparte)라는
아들 하나밖에 없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원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젊은 시절에 데지레 클라리(Desiree Clary)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이 데지레 클라리는 프랑스의 부유한 사업가인 프랑수아 클라리(Francois Clary)의 차녀이며
프랑수아 클라리의 장녀는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데지레 클라리는 나폴레옹과 결혼하지 못하고 대신 나폴레옹의 수하 중 한 명인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Jean-Baptiste Bernadotte)와 결혼했다.
이 베르나도트는 나중에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스웨덴의 왕이 되고 데지레는 스웨덴 왕비가 되어
현재까지도 이 베르나도트의 후손이 스웨덴의 왕을 하고 있다.
한편 나폴레옹은 프랑스 귀족 알렉상드레 드 보아르네(Alexandre de Beauharnais)의 미망인이었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Josephine de Beauharnais)와 사랑에 빠져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고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가 되자 조제핀도 프랑스의 황후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조제핀은 나폴레옹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아이 또한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전 남편인 알렉상드레의 아들과 딸을 입양했다.
그러나 입양한 후에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나폴레옹에게 애인이 생겼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새로 생긴 예쁜 애인에게 사랑을 쏟았고
조제핀은 외로운 나머지 사치에 푹 빠져살다가 나폴레옹의 일방적인 이혼 요구를 받고
결국 나폴레옹과 떨어지게 된다.
한편 나폴레옹은 교황과 사이가 매우 안좋았는데
나폴레옹은 교황 따위는 우습게 보고 거의 1000년 동안 이어진 교황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협박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나중에 교황령을 침략하는 등 가톨릭 세계에 대해 대항했다.
(사실 교황청에서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할 때 조제핀에게 직접 왕관을 씌워줬던 사건때부터 나폴레옹을 고깝게 봤다)
나폴레옹이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때 당시 황제로부터 데려온 그 황제의 딸이 바로 나폴레옹의 후처
마리 루이즈(Marie Louise)로, 마리 루이즈는 신성 로마 제국이 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이 조제핀을 찼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줄곧 나폴레옹을 증오했으나
정작 나폴레옹과 결혼할 때에는 고분고분했다고 한다.
마리 루이즈(1791-1847)
그러나 전처 조제핀과 달리 마리 루이즈는 1791년생으로
1769년생이었던 나폴레옹과 무려 22살 차이, 아버지와 딸 뻘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리 루이즈와 관계를 가지고
마리 루이즈는 1811년 나폴레옹의 첫 적자(適子)인 나폴레옹 2세를 낳는다.
그러나 마리 루이즈는 정작 자신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에게 큰 관심이 없었으며
이는 나중에 나폴레옹 2세가 일찍 죽게되는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한다.
나폴레옹 2세(1811-1832)
아버지인 나폴레옹이 죽고 나서 나폴레옹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원래 약했던 몸과 어머니 마리 루이즈의 외면, 상사병 때문에 20대 초반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나폴레옹 황제의 가계가 끊기느냐? 아니다.
사실, 나폴레옹에게는 아까 말했듯이 조제핀과 마리 루이즈 말고도
두 명의 애인이 또 있었다.
동양으로 치면 '첩'에 해당하는데 서양에서는 '첩'을 '애인(mistress)'이라고 부르고
동양의 '서자'를 서양에서는 'illegitimate(비합법적인) son'이라고 부른다.
두 명의 애인 중 한 명의 이름은 엘레오노르 드누엘(Eleonore Denuelle)이었다.
그녀의 풀 네임은 루이즈 카트린 엘레오노르 드누엘(Louise Catherine Eleonore Denuelle)이며
프랑스의 중산층에서 태어나 외모가 ㅅㅌㅊ였고 머리가 좋았다. 원래 18살에 프랑스의 장교인
장 프랑수아 르벨 오노르(Jean-Francois Revel-Honore)와 결혼했지만 그가 사기죄로 2년형을 받자 그와 이혼했다.
한편 당시 황제였던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 보나파르트(Caroline Bonaparte)가 잘 아는 사이였던 엘레오노르를
오빠 나폴레옹한테 소개한다. 나폴레옹은 엘레오노르가 마음에 꼭 들었지만
나폴레옹에게는 이미 조제핀이라는 정식 부인이 있었기 때문에 엘레오노르를 애인으로 맞아들인다.
엘레오노르 드누엘(1787-1868), 엘레오노르도 나폴레옹과 나이 차이가 상당했다.
엘레오노르는 나폴레옹의 애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그 아들의 이름은
샤를 레옹 드누엘(Charles Leon Denuelle, 이탈리아식으로 하면 까를로 레오네 데누엘레 Carlo Leone Denuelle)이었다.
샤를 레옹 드누엘(1806-1881)
샤를 레옹과 그의 어머니 엘레오노르.
이 사람의 이름을 보면 샤를과 레옹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샤를은 나폴레옹의 아버지인 까를로 부오나파르테(Carlo Buonaparte)의 프랑스식 이름인
샤를 보나파르트(Charles Bonaparte)의 샤를을 따온 것이고,
레옹은 나폴레옹(Napoleon)의 leon부분을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적자인 나폴레옹 2세의 이름에도 샤를을 넣은 것으로 보아
이는 아버지 까를로에게서 따왔다는 것이 확실해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버지가 나폴레옹임에도 불구하고 성이 보나파르트가 아니라 어머니의 성인 드누엘인데
이것은 동 서양이나 똑같은 풍습으로 서자에게는 아버지의 성을 못 쓰게 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샤를 레옹은 비록 나폴레옹을 아버지라 부르지는 못했으나 백작 지위에 있으며 풍족한 삶을 누리다 장수했다고 한다.
사실 엘레오노르는 나폴레옹의 정식 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샤를 레옹이 태어난 지 2년 후에
자신의 믿음직한 장군에게 엘레오노르를 짝지워주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그 나폴레옹의 장군은 행방불명되었으며, 이에 엘레오노르는 다른 귀족과 재혼해서
80세가 넘게 살고 죽었다.
그 후 샤를 레옹은 아들 여럿과 딸 하나를 남기고 죽었는데
아들들은 전쟁통 속에서 모두 죽고 오직 딸만 살아 남아
현재 프랑스에는 그 딸의 자손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이는 딸이 직접 증언한 내용이라고 한다.
한편 나폴레옹에게는 또 다른 애인이 있었다.
그녀는 다름아닌 폴란드 사람으로, 이름은 마리아 왈루스카(Maria Walewska)였다.
마리아 왈루스카(1786-1817)
나이는 엘레오노르와 비슷했으며, 폴란드의 유복한 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정숙하고 미모가 상당했으며
어렸을 때 그녀의 가정교사 중 한명이 바로 유명한 음악가 프레데리크 쇼팽(Frederic Chopin)의 아버지
니콜라 쇼팽(Nicholas Chopin)이라고 한다. 사실 니콜라 쇼팽은 프랑스 사람인데 폴란드에서 거의 활동했으며
프레데리크 쇼팽도 폴란드에서 낳았다.
그녀는 결혼할 나이가 되자 한때 폴란드 국왕의 중신이었던 콜로나 왈루스키(Colonna Walewski)와 결혼했다.
그런데 당시 그녀의 조국 폴란드는 프러시아의 식민지이었으며 당시 나폴레옹은 영토 전쟁으로 프러시아를 치기 위해
폴란드에 온 상황이었다.
나폴레옹과 우연히 만난 그녀는 나폴레옹이 조국 폴란드를 프러시아로부터 해방시켜주기를 원했고
나폴레옹은 마리아 왈루스카를 보자마자 푹 빠져버렸다.
마리아는 꽤나 애국심이 투철한 여자였으며 나폴레옹의 애인이 되면 폴란드가 해방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감정적으로도 서로 끌리게 된 두 사람은 애인 관계가 되었다.
그 뒤로 마리아는 나폴레옹을 항상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다.
마리아는 곧 나폴레옹의 서자를 낳았는데 그 서자의 이름은 알렉상드레 플로리안 조제프 왈루스키(Alexandre Florian Joseph Walewski)였다.
알렉상드레 플로리안 조제프 왈루스키(1810-1868)
위에서도 말했듯이 서자는 아버지의 직책을 그대로 따를 수 없었으므로 그는 어머니의 직책인
콜로나 왈루스키 백작을 이어받았다.(마리아는 원래 콜로나 왈루스키 백작의 부인이므로 그녀의 직책은 백작부인)
그는 백작 자리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여러가지 직책을 겸했는데 그 중에는 프랑스 의회장, 주지사, 폴란드 대사도 있었다.
그는 나중에 공작의 지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 영국의 조지 몬테규(George Montagu) 6대 샌드위치(Sandwich) 백작의 딸 캐서린과 결혼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총 1남 1녀를 두었으나 둘 다 일찍 죽었다.
조지 몬테규 백작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샌드위치의 유래가 된 존 몬테규(John Montagu) 4대 샌드위치 백작의 손자이다.
그 다음에는 교황청의 관리인 자노비 디 리치(Zanobi di Ricci)의 딸 마리아 안나와 결혼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총 1남 3녀를 두었고 아들은 자식을 두지 않았으며 딸 세 명중 한 명은 일찍 죽고 나머지 두 명은 결혼해서 자식을 여럿 두었다.
마지막으로 알렉상드레는 레이셸 펠릭스라는 여배우와 애인 관계가 되었으며 그 사이에서 둘은
알렉상드레 앙투안 콜로나 왈루스키(Alexandre-Antoine Colonna-Walewski)라는 아들을 두었고 그는 또 많은 자손들을 남겼다.
위의 샤를 레옹은 남계 자손을 두지 않았지만 알렉상드레의 경우 남계 자손을 레이셸 펠릭스를 통해 두었다.
그러나 레이셸과의 관계는 정식 결혼이 아니라 애인 관계였기 때문에 아들 알렉상드레 앙투안은
정말 알렉상드레의 친아들인지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 2013년, 프랑스의 한 연구팀이 남계 자손들을 많이 남기고 지금도 보나파르트 가문을 이어오고 있는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Jerome Bonaparte)의 먼 자손인 샤를 나폴레옹(Charles Napoleon)과
위의 알렉상드레의 자손이라고 알려진 사람의 Y 염색체를 채취해 비교 분석해본 결과,
염색체가 일치하였다! 그로써 알렉상드레의 남계 후손들은 나폴레옹의 남계 후손들이 맞다고 결론지어졌다.
이상으로 글을 마친다
세줄요약
1. 나폴레옹의 아들은 나폴레옹 2세 뿐만 아니라 두 명 더 있다.
2. 그 중에서도 한 명은 지금까지 직계 후손이 존재함
3. 곧 나폴레옹의 직계 후손이 있다는 뜻.
헐... .진짜 티비 나오면 유명스타 되는거 시간 문제 아님 ㅇㅈ? ㅇ ㅇㅈ